[남재철 칼럼] 가을장마 덫에 갇힌 농업
남재철 전 기상청장·서울대 특임교수 2025. 10. 19
올해는 유난히 ‘태풍이 없는 해’로 기록되고 있다. 현재까지 북태평양에서 23개의 태풍이 발생했지만 우리나라에 영향을 준 태풍은 하나도 없었다. 여름 장마는 짧게 마른장마로 지나가고, 가을 수확철에 비가 이어지는 가을 장마로 농가 피해가 속출하고 있다.
기후변화는 이제 더이상 미래 이야기가 아니다. 계절간 경계가 무너지고 비의 양과 시기, 기온의 변동성이 커지면서 예측 불가능한 기상이 일상이 되고 있다. 문제는 이러한 변화가 농업의 생명선인 ‘기후안정성’을 근본적으로 흔들고 있다는 점이다.
특히 올해와 같은 기후위기는 농업 생산의 모든 단계에 영향을 미친다. 파종과 모내기 시기를 조정해야 하고, 수확 시기 또한 지역별로 제각각 달라진다. 병해충의 발생 주기도 예측이 어려워 농약 살포 시점을 놓치거나 과다 사용으로 이어질 위험이 크다. 물 관리, 비료 사용, 병해충 방제, 저장시설 가동 등 모든 과정에서 ‘기후 리스크 비용’이 추가로 발생한다.
그렇다면 우리 농업은 어떤 방향으로 기후위기에 대응해야 할까? 무엇보다 기후적응형 농업체계로의 전환이 시급하다. 단순히 피해를 복구하는 사후 대응이 아니라 변화된 기후 조건에서도 안정적인 생산이 가능하도록 제도와 기술을 구조적으로 바꾸는 접근이 필요하다.
먼저 기상정보 기반의 정밀농업시스템을 확충해야 한다. 최근 농촌진흥청에서 개별 농장에 맞는 기상정보와 재해 예측 정보를 제공해 농작물 피해를 줄이는 ‘농업기상재해 조기경보시스템’을 서비스하고 있지만 아직 현장 활용도는 낮다. 농민들이 실시간으로 토양수분, 강수 예측, 병해충 발생 가능성 등을 확인하고 의사결정에 활용할 수 있는 디지털 플랫폼을 구축해야 한다.
둘째, 기후적응 품종 개발과 보급에 국가적 투자를 늘려야 한다. 최근의 고온 다습한 여름, 일조량이 부족한 가을, 극심한 한파의 겨울은 기존 품종의 생육 환경을 바꿔놓고 있다. 고온 내성 과수, 장마에 견디는 밭작물 등 품종 개발이 필수다.
셋째, 농업용수와 저수지 관리의 통합적 전환이 필요하다. 올해처럼 비가 제때 오지 않거나 극한폭우가 오는 경우 기존의 관개 체계만으로는 물 조절이 어렵다. 저수지의 다목적 활용, 농업용수 재이용, 지역간 물 순환 관리가 중요하다. 한국농어촌공사가 추진 중인 스마트 물 관리시스템을 확대하고, 각 지방자치단체는 이를 지역별 기후적응 정책과 연계해 운용해야 한다.
넷째, 농작물재해보험 제도를 이상기후 중심으로 개편해야 한다. 현재 보험은 태풍·냉해·우박 등 전통적 재해에 집중돼 가을 장마나 장기 습해는 보상에서 제외되는 경우가 많다. 보장 범위를 ‘이상기후 피해’로 확대하고, 보험료 부담을 줄이는 국가 보조를 확대해야 한다.
마지막으로 기후위기 대응을 농업정책의 핵심축으로 삼는 거버넌스 개편이 요구된다. 그동안 농업정책은 생산성 향상이나 농가소득 보전에 집중됐지만 앞으로는 ‘기후적응 능력’을 국가 농정의 핵심 지표로 삼아야 한다. 농림축산식품부를 중심으로 관련 부처와 기관, 지자체가 협력해 ‘기후적응형 농업 종합위원회’(가칭) 구성으로 상시 점검 체계를 마련해야 한다.
기후변화는 이제 농업의 ‘상수’가 됐다. 예측 불가능한 날씨 속에서도 국민의 식량안보와 농가의 생존권을 지켜내기 위해서는 과감한 정책 전환이 필요하다. “기후가 바뀌면 농업도 바뀌어야 한다.” 이제는 선언이 아닌 실천의 시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