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농림축산식품부가 벼 깨씨무늬병을 농업재해로 인정했지만 비현실적인 피해 입증 요구로 농민들의 원성을 사고 있다. 지난 15일 전북 순창군 순창읍 복실리 들녘에서 농민들이 추수에 나선 가운데 벼 깨씨무늬병이 번진 논들이 붉은 색깔을 띠고 있다. 한승호 기자
농식품부, 애초 피해 입증 불가능한 RPC 출하량 기준 제시
피해 입증 난감한 농민들 “안 줄 거면서 생색내기용 발표”
한국농정신문 김수나 기자 2025. 10. 31
지난 14일 농림축산식품부가 벼 깨씨무늬병을 농업재해로 인정했지만, 피해신고 접수 과정에선 되레 농민들의 원성이 터져 나왔다. 피해접수 증빙 자료 중 하나로 RPC(미곡종합처리장) 출하내역을 제출하라는 지침 때문이었다.
신청 대상은 지번별 피해율이 30% 이상인 농지인데, 전년도 출하량, 심지어 3년 치 출하량을 RPC·DSC(건조·저장시설)·정미소에서 떼와야 하는 상황에 여기저기서 ‘비현실적’ 증빙 방식이란 지적이 속출했다. 해당 출하량이 올해 피해가 발생한 논과 반드시 일치하지 않을뿐더러 통상 총 출하량을 파악할 순 있어도 필지별 출하량, 출하된 나락이 피해 곡인지 아닌지는 파악하기 어려워서다.
아울러 농작물재해보험 미가입 농가나 정미소에 출하하는 소농가들은 피해 입증 자체가 어렵다. 전년도에 견줘 올해 출하량이 30% 이상 줄어야 한다는 것도 지난해 심각한 벼멸구 피해를 본 전남북 지역으로선 난감한 기준이다. 지난해 피해가 매우 컸기에 이에 맞추다간 벼 깨씨무늬병으론 재해를 인정받기 힘들기 때문이다. 가을장마로 수확 시기까지 늦어져 농민들이 밤낮 수확에 매달려야 하는 가운데 증빙 자료를 구하러 일일이 RPC를 찾아다니기도 어렵다.
“대부분 농민이 RPC나 DSC에 출하하는데 매년 출하량이 다르다. 예를 들어 올해 1000평 생산량을 출하했다면 지난해엔 2000평, 재작년엔 1500평 이런 식인데 어떻게 증빙이 되나. 또 이런 자료들은 면이 공적으로 요청하면 다 확보할 수 있는 것이다. 수확하느라 정신없는데 자료 받으러 갈 새도 없다. 이렇게 증빙 절차를 비현실적으로 해놓고 농민들 괴롭게 하는 걸 보면 농식품부가 결국 지원하지도 않을 걸 생색내기용으로 발표한 것 아니겠냔 생각마저 든다.” 강원 홍천군 영귀미면에서 벼농사를 짓는 한 농민의 토로다.
출하량만으론 병해로 인한 생산량 감소 폭을 구분할 수 없는데도 이전 출하량보다 적으면 재해가 인정되고 많으면 인정받지 못하게 되는 구멍이 생기는 셈이다. 농민들은 차라리 담당 공무원이 현장에 나와서 눈으로 필지별 피해 현황을 확인해 해당 필지에 대한 정확한 피해율을 책정하는 게 더 객관적이라고 본다.
전북 김제시 봉남면의 한 농민도 지적을 이어갔다. “RPC에선 출하량만 계산하지, 병 걸린 나락인지는 전혀 판단할 수 없다. 단지 수확 사실만 증빙되는 것이지 이를 근거로 피해를 입증할 순 없다. 출하량으로 이전에 비해 올해 수확량이 얼마나 줄었나 따지겠다는 건데 그게 벼 깨씨무늬병인지 도복인지 흰잎마름병 때문인지 어떻게 확인하나?”
이는 단지 올해에만 그치는 문제가 아니다.
지난해 벼멸구로 초토화됐던 전남북 지역에선 애초 출하량을 기준으로 피해율을 산출하겠다는 발상 자체가 잘못됐다는 지적이 나온다.
박상정 해남군의원(더불어민주당)은 “전년 대비 30% 이상 출하량이 감축돼야 재해로 인정한다는데, 지난해 벼멸구로 피해가 워낙 컸기 때문에 이 기준으로라면 벼 깨씨무늬병을 재해로 인정받을 농가는 거의 없을 것이다. 결국 소출이 거의 없어야만 재해를 인정받을 수 있다는 거잖나”라며 “벼 깨씨무늬병은 소출이 좀 줄 순 있어도 수확량엔 큰 변화가 없을 수 있다. 더 큰 문제는 방아를 찧으면 낟알이 다 깨지는 거다. 그래서 맨눈으로 확인한 피해 정도를 기준 삼아야 한다. 그래야 행정도 일하기 편하다. 공무원들마저도 출하량 기준으로 조사하면 복구비를 받을 농가가 거의 없을 거라고 말할 정도다”라고 전했다.
출하량 기준은 실제 피해 입증도 어렵고 농민·공무원 모두에게 번거로운 방식이란 것이다. 아울러 박 의원은 “농식품부가 농업재해를 인정만 해놓고 까다로운 세부 지침을 내려보내니, 농민들은 다 지원되는 줄만 알았다가 ‘이럴 바에야 신청 안 한다’라고 할 수밖에 없는 실정이다. 농민들을 귀하게 생각한다면 이럴 순 없다”라고 비판했다. 이어 기후재해가 잦아진 만큼 전년 출하량이 아닌 정상적인 평년 수확량의 평균치를 기준으로 수확 감소분을 산출하는 방식 등으로 시급히 개선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관련해 박형대 전남도의원(진보당)은 등숙률 저하도 피해율에 반영돼야 한다고 지적한 바 있다.
각 도와 군도 어떻게든 증빙만 되면 피해를 폭넓게 인정하겠다는 방침으로 현장 민원에 대응하며 RPC·DSC·공공비축미 출하량 자료를 나서서 확보하고, 이조차 어려우면 출하량 자료 없이도 농작물재해보험 접수증이나 피해 벼 사진으로 제출 서류를 갈음하고 있지만 농식품부가 지침을 내려보낸 이상 고충이 크다. “농식품부가 이런 식으로 증빙을 요구해서 농민들이 아예 신청을 포기하게끔 하려는 것 아닌가란 의심마저 든다. 일선 담당자들은 일은 일대로 하면서 현장의 원성까지 받아내고 있다.” 한 도의 농정과 팀장의 토로다. ‘보여 주기식 탁상행정’이란 비판이 농식품부로 향하는 이유다.